2011년 1월호부터 월간 Ue(Unite Earth) Magazine에 연재된 '0과1 사이'는 디지털화 시대의 0/1 아니오/예 off/on 식 이분법적 사고가 잡아내지 못하는 그 사이의 세계 - 무한한 창조력을 가진 정신세계 - 와 그것을 담고 있는 인간성(Humanity)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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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음악은 무엇인가? 좋은 예술 작품은 무엇인가? 머릿속으로 늘 생각하고 마음의 눈으로 항상 바라보려 노력하는 주제이다. 


축구나 농구 격투기 등 스포츠에는 규칙, 룰이 있고 경기장의 규격, 선수들의 복장 규정 등과 같은 형식이 정해져 있다. 만약 이 규칙을 어긴다면 제재를 당하고 심하면 경기 자체가 아예 무산되는 수도 있다. (농구선수가 실수로 자기 여자친구 발레복을 입고 경기장에 온다면? 출장정지는 물론이고 폭력적인 나라에선 감독한테 귓방맹이를 후려 맞는다.) 

그렇지만 음악이나 영화, 미술, 패션 등 예술의 세계는 스포츠와 다르게 규칙이나 룰을 어긴다고 해서 성립이 인정되지 않거나 고막이 터지는 일은 없다. 아주 유명한 일화인 존 케이지의 '4분33초'퍼포먼스를 생각해보자. 음악공연에 관객을 불러다놓고 4분 33초간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기행을 선보였음에도 '고정관념의 해체' 라든지 '연주자의 일방적 연주 뿐만 아니라 관객의 소음이나 존재, 분위기도 공연의 일부임을 일깨우는 효과를 거뒀다'고 평가받지 않는가. 


이처럼 예술은 규칙과 형식을 지키는 것만이 아닌 규칙을 깨는 것이 아주 중요한 분야이다. 지난해 귀국 직후 가진 '인디펜던트 아티스트의 길' 이라는 강의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예술은 멋있게 틀리는 것이다' 라고 열심히 강조했는데 이 역시 규칙을 깨는것의 미학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적어도 예술의 세계에서는 규칙을 완벽하게 준수하는 것만으로는 아주 높은 경지에 올라갈 수 없다. 

딸딸 외우는 방법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학업 성취도를 높일 수 있으나 그 이상이 되려면 외우기만 하는 능력으로는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한국사회에 예술 저변이 얕은 것일까? 교사의 질문에 정답이 아닐까봐 아무 대답도 안하고 서있는 학생이나, 뭔가 엉뚱한 대답하면 틀렸다고 면박주는 선생이나…관습적으로 뻔한 내용의 대중문화를 내보내는 문화 공급자와 그걸 못쫓아가면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여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자 등 이러한 비일비재한 현실이 다 '정답 맞추기'에 급급한 문화의 반영들이다. 이래서는 창조적이 될 수 없다. 창조적이 되려면 규칙을 깨는 파괴미가 필요하다. 마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면서 자기 스스로의 틀을 깨야 더 크고 넓은 사람이 될 수 있듯이. 알을 깨는 아픔이 있어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듯이. 이 아픔의 이름은 파괴미 이다. 파괴미에서 독창성이란 꽃이 핀다 .


그러면 이번엔 형식미를 생각해보자. 이를테면 한국에서 알엔비 가수라고 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듣다가 '어? 이게 알엔비야?' 하고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왜냐면 딱잘라 정해진 것은 아니어도 알엔비라고 하는 장르를 규정짓는 형식적 요소들이 분명히 있는데 그것들이 너무나 많이 빠져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소위 뽕끼 라고 하는 한국식(이것 역시 일본에서 가져와 변형시킨) 멜로디로 버무려져 있는데 이를 알엔비라고 부르는 언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무슨 알엔비 공식이 있는건 아니어도 오리지널 알엔비의 대부분에서 캐치할 수 있는 코드 진행이라든가 드럼의 리듬과 질감, 가사의 운율과 정서가 담겨있지 않은데도 알엔비라고 부른다면 뭔가 다른 장삿속이 있다는 찝찝한 의심을 하게 된다. 일본 여행을 할때 편의점에서 김치를 사먹었는데 소금물에 절이지도 않은 듯한 배추에 매운맛은 별로 없고 단맛이 가미된 괴이한 맛이 났을때 이건 차마 김치라 부를 수가 없겠구나 싶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한국식 알엔비 라고 부르더라도 일단은 '알엔비' 여야 '한국식' 이라는 수식을 앞에 붙일 수 있는 것이 당연한 이치 아닌가. '일본식' 이란 말을 앞에 붙인다고 해서 김치가 단맛 나는 배추절임으로 바뀐다면 엄밀히 말해서는 비겁한 사기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느정도의 엄밀함 마저 없는 상태를 우리는 '엉망진창' 이라고 부른다. 화장실과 부엌이 한곳에서 섞여 뒹구는 엉망진창 속에서 살지 않으려면 '김치'와 '단배추절임', '알엔비'와 '가요'를 구별해서 이름 붙이는 것이 원형과 변형을 둘 다 살리는 길일 것이다. 오랜시간에 걸쳐 다듬어지고 형상이 잡힌 틀의 이름은 바로 형식미 이다. 잘 갖추어진 형식미에서 정통성이 드러난다.


예술은 형식미와 파괴미, 정통성과 독창성의 결합으로 이루어져있고 그 황금비를 잘 살려내는 것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길이다. 모범생이기만 하면 답답하고 날라리이기만 하면 부담스럽다. 그러나 예의바르고 마음씨 고와서 가까이 하게 된 여성이 어느날 뇌쇄적이고 섹시한 매력을 풍긴다면 거기에 안넘어갈 남자가 있을까? 날라리 인줄만 알았던 남자가 알고보니 지극한 효자인데다가 근사하게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경제학도라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매력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 싶어지지 않을까? 엘리트 코스만 밟고 살아온 부잣집 도련님이 진심어린 뜨거운 마음으로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개혁에 앞장선다면 훨씬 더 멋있고 귀중하게 보이지 않을까? 이와 같이 예술 작품이 주는 감동보다도 훨씬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삶' 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 그 자체가 어떤 예술보다도 더 예술적이라는 의미. 예술도 결국은 인간의 삶을 모방하고 축소한 하나의 단면이므로, 역설적이지만 인간의 '삶' 본연의 모습을 재발견하고 참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술을 모방하여 살아가야 할 것 같다. 글을 쓰는 동안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을 계속 들으면서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들, 내가 살아가고 싶은 방식들이 떠오르고 어떤 정신이 스믈스믈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때 갑자기 방향감각을 잃고 아득하기만 할때에 예술을 모방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 내 삶이 예술이 되도록 해야겠다.


"White collar conservative flashin' down the street, pointing that plastic finger at me, they all assume my kind will drop and die, but I'm gonna wave my freak flag high."                      - Jimi Hendrix -           If 6 was 9 중에서. 


Posted by JINBO 트랙백 0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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